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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광식>

 

겨울에 앞서 한국 사람들은 배추로 김치를 담가 땅에 묻는다. 그리고 그린란드에서는 순록이나 바다표범을 잡아 눈 아래 차가운 땅에 묻는다. 이는 모두 식량을 구하기 힘든 때에 미리 음식을 마련해 두기 위함이다.

 

곧 생존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무심코 찍어 두었던 필름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사진이 이미지가 되어 이뻐 보일 때가 있다. 당시에 전혀 이러저러한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시간을 거쳐 맞딱드린 어떤 사진이 마른 의미가 되살아나듯 '이미지'의 가치로 숙성된 멋으로 신비함을 준다. 즉 내게 창작활동의 에너지로서 빵과도 같은 생존이 되는 경우다.

 

  

2005년 주변 사람과 월미선착장에서 차를 이용해 영종도로 소풍을 갔다. 낚시도 했고,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잤던 걸로 기억한다. 이 사진은 당시 물 빠져나간 뻘을 담은 것이다. 단번엔 아리송하지만 다시 보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말라 갈라진 틈 사이로 갖가지 바다생물의 호흡이 느껴지듯 명확하다. 바다는 이래서 고였으되 '살아 있다'라고 하는게 아닌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찢기는 가슴을 안고 있지는 않나.

 

 

도시 곳곳의 삽질은 이제 흔한 풍경이다. 큰 문제인데 문제로 보지 않고 답인마냥 밀어붙이는 파렴치들의 공격은 가히 메마른 표면을 더욱 두텁게 하고, 그런 표면을 뚫어 가느다란 호흡 한 모금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조가 비추는 시대의 현상을 이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하겠다면 너무 큰 욕심이 될까? 억지가 되는가?

 

 

시간이 층층히 쌓여 음식의 맛을 결정하듯이 나의 사진도 가끔 숙성작으로 탄생하는 경우를 본다. 이때 사진이 뿜는 순간의 에너지는 거역을 꺽는 명확으로 자리 잡는데 그런 사진이야말로 나의 '이미지'로서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그 배후엔 늘 작가의 서툰 투정이 배이기 마련이고 '이미지'는 이러한 투정의 이야기란 말이지.